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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충주는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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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대표이사
기사입력 2019-10-17

역사적으로 충주의 정신은 강했다.

 

삼국시대 각축을 벌이던 그 시절에도 삼국 중 가장 강성했던 왕이 충주를 차지할 수 있었고 제2의 부도로서 강성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고려 태조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도 중추적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에 세계를 제패하고 가장 강력한 나라를 구축했던 몽고가 9번에 걸쳐 충주를 침공했을 때에도 충주는 8번에 걸쳐 승리하며 이를 물리친 곳이다.

 

이처럼 강인했던 충주의 정신력이 가장 크게 빛났던 대몽항쟁에 대한 실체적 점검을 해 본다. <편집자주 >

 

 

◇ 세계를 제패한 몽고

 

몽고 고원을 중심으로 살던 몽고 유목민들은 키야트, 타타르, 게레이트, 나야만 등이었으나 각 부족간에 싸움이 심했다고 한다. 몽고를 통일한 테무진은 키야트 부족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 부족에게 살해당하자 키야트 부족은 지도자를 잃고 흩어졌다.

 

테무진은 타이치우트 부족에게 잡혔다가 탈출하여 주변사람들을 모으고 게레이트 부족장 토크릴칸에게 도움을 청하며 그의 도움으로 작은 촌락의 족장으로 살면서 그의 세력을 키우게 된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자 토크릴 칸의 지원을 받아 첫 출전하에 대승을 거둔다.

 

1201년 테무진은 자무카족과 싸웠지만 패했다. 그러나 자무카족의 잔혹한 행동에 의해 여러부족들이 테무진에게 모여드는 바람에 더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1204년 서방의 나이만족가지 물리치고 몽고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1206년 몽고 전체를 아우르는 칸으로 등극 징기스칸이 된다.

 

그리고 그의 정복 전쟁이 시작되는데 처음의 정복전쟁 의도는 남의 나라를 빼앗아 영토를 넓히는 목적보다는 군사적 위협을 통한 화친으로 유목민으로 숙원인 물자의 안정적 확보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오고타이, 구유크, 몽케, 쿠빌라이 등에 의해 정복전쟁으로 전환한다.

 

2대 오고타이 대칸이 즉위한 1229년부터 3대 구유크 4대 몽케 그리고 5대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킨 1279년까지 반세기에 걸친 정복전쟁은 1232년 금나라 멸망, 1236년 바투의 러시아 정복, 1241년 동유럽의 폴란드, 헝가리, 독일,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정복해 나가던 중 오고타이의 죽음으로 철수 4대대칸 몽케는 서아시아의 칼리프 정권과 시아파세력 니자리파 원정 바그다드 함락과 시아파 요새파괴 등 승승장구 하였으나 1206년 팔레스타인 아인잘루트에서 이집트 맘루크왕조의 맘루크 군대에게 패한다.

 

또한 남송도 바로 공략하지 못하고 1234년 송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1235년부터 송과의 싸움을 시작한 이래 1279년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40여년간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몽고의 대제국은 중국, 러시아 일부는 물론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켜 동유럽까지 진출하는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그 면적은 2,400만㎢, 인구 1억1,000만 명 정도로 당시 육지 면적 의 16% 전 세계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국가를 정복하게 되는 것이다.

 

몽고가 이처럼 정복전쟁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군의 탁월함과 조직적인 행동 능숙한 작전과 수행능력 겸비 엄격한 규율과 절대적인 충성으로 일사분란한 정예군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복한 곳의 군대를 이용하여 전방위에 내세우는 치밀함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5대 쿠빌라이 칸의 등극으로 인해 이를 반대하는 세력 간의 내분으로 최강의 몽고도 분열이 일어나 패망의 길로 서서히 접어들게 된다.

 

 

◇ 몽고에 쓴잔을 안겨준 전투

 

승승장구하면서 전 세계를 휩쓸던 몽고도 패배의 쓴 잔을 마신 전투가 몇 군데 있다. 그 첫 번째 패배는 고려 충주에서 1253년 김윤후 장군에게 패한 것이고 두 번째는 쿠빌라이가 1258년에서 1287년까지 3차에 걸쳐 베트남 전쟁에서 패한 것이다.

 

또한 1260년 팔레스타인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한 경력과 남송과의 조어성 전투의 물고 물리는 전투였던 것이다.

 

그동안 충주의 김윤후 장군 전투는 많이 보도한 바 있어 이번에는 베트남의 쩐왕조와의 전투부터 소개하기로 한다.

 

몽고의 5대 칸 쿠빌라이는 1258년 우량카다이에게 3만 대군을 주어 베트남을 치도록 한다.

 

이듬해 1월 몽고군과 베트남 쩐왕조 타이똥황제의 베트남군이 까로강유역 비엣찌에서 격돌하게 되는데 초기에는 몽고군이 압승이었다.

 

몽고군은 여세를 몰아 수도 탕롱성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실권자 쩐투도의 유격전과 기후를 활용한 지구전, 식량전, 소작전 등으로 견디다 못한 몽고는 베트남에 화의를 요청하고 철수하기에 이르른다.

 

제2차 침입은 1284년 쿠빌라이에 의해 50만 대군을 정비하여 침공했다.

 

이때에도 베트남은 필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중과부 작전으로 수비사령관이 전사하고 수도 탕롱성이 함락됐다.

 

베트남의 위기를 견디지 못한 베트남 황제 인종이 항복하기로 하자 쩐흥다오 장군이 항복을 하려거든 제 몸을 먼저 베소서 하면서 싸울 것을 주장하고 군사들에게 격장사(핫떵시) 라는 글로서 왕조의 위급함을 호소했고 장수와 병사들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싸울 것을 결의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사기가 오른 베트남군은 수도 탕롱을 탈환하였고 찐흥다오 장군은 베트남 무더위와 풍토병 그리고 수군을 활용하는 놀라운 전술전략으로 승리를 거뒀다.

 

제3차전은 1287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고 아구룩씨의 지휘아래 30만명의 수륙군을 동원해 복수전을 단행하였다.

 

2차 침공때 베트남군은 모두 동원해도 채 20만이 되지 않는 병력이었다.

 

그러나 찐흥다오 장군은 수적 열세 극복을 위한 유격전술로 몽고군의 식량조달을 막았고 게릴라전으로 병참선을 마비시킨 것은 물론 무더위와 열대병으로 고전하였던 몽고군이 식량 조달 마저 여의치 않게되자 큰 것을 간파하고 썰물 때 강바닥에 쇠말뚝을 촘촘히 박아두고 밀물 때 물 수위가 높아지면서 쇠말뚝이 보이지 않게 되자 몽골군을 강 깊숙이 유인한 후 썰물 때 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마침내 썰물 때가 되자 강 바닥이 드러나면서 몽고의 배들이 쇠말뚝에 걸려 옴짝달싹 할수 없게 되자 이때를 노려 불화살과 돌을 날려 몽고군을 격퇴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10만구의 몽고병사 시체가 강물을 떠다녔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밧당강의 치욕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쩐롱다오 장군은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 만큼 베트남에서는 추앙받는 장군으로 쩐롱다오 장군 사원에 모셔져있다. 또 하나의 몽고에 패배를 안겨준 전투가 아인잘루트 전투다.

 

비록 훌라구가 대칸인 몽케의 사망으로 주력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인잘루트 지역의 전력이 약화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쿠투즈는 시리아에 지대병력인 기트부카의 부대와 몽골의 소수 동맹군들만 남아 있는 것을 격파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인해 이집트는 몽고의 공습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고려 충주의 대몽항쟁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몽고의 군대는 세계를 제패할 정도로 강한 군대였지만 그 기세가 기마를 통한 기동력에 있고 조직력에 있기 때문에 수상전이나 기후나 산악전, 풍토병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잘 이용한 곳은 승리하고 그렇지 못한 곳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충주에서의 대몽항쟁은 9차례나 되었다.

 

충주의 대몽항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이를 기록한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대몽항쟁의 영웅 김윤후 장군에 대한 기록은 그가 승려에서 환속을 한 이후 결혼을 했는지 자녀가 있었는지는 전혀 기록에 없고 그 후손도 나타나지 않아 알 길이 없다.

 

그가 70여일간 싸웠던 충주산성의 대몽항쟁은 그의 기개와 지혜 그리고 장병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노비문서까지 불태우며 전선을 승리로 이끈 것은 후대에 좋은 교훈이 되기에 충분했다.

 

충주에서의 9번 싸움을 살펴보면 1차 침입시 양반계급(양반별초)은 도망가고 없고 노군잡류별초였던 지광수가 노군 등을 이끌고 적의 별동부대를 막아 싸워 승리했고 두 번째는 1253년 5차 침입시 먼저 출몰한 몽골군을 충주창정 최수가 복병을 두고 기다려 적 15급을 베고 병장기와 포로가 된 남녀 200여 인을 빼앗았다.

 

그 공으로 최수는 대정으로 세수되었다. 세 번째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70여일간의 전투로 몽고 총사령관 야굴을 물리친 충주산성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김윤후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노비문서를 불살라 죽기를 각오한 병사들이 끝까지 싸워 이긴 것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김윤후는 상장군이 되고 충주는 국원경으로 격이 높아졌다.

 

네 번째는 다인철소민 들이 몽고군을 막은 공이 있어 소를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으로 고려사에 전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성 안사람들이 정예병을 뽑아 반격하자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고 여섯 번째는 몽고병이 대원령(지금의 하늘재)을 넘는 것을 기습 공격하여 몽고병 일천여명을 사살하였다.

 

일곱 번째는 충주주성을 몽고군이 공격한 것인데 관민들이 대부분 산성을 지키기 위해 나간사이 노약자들은 주살한 것이다.

 

여덟번째는 월악산성의 싸움에서 몽고군을 물리친 것이고, 아홉 번째는 1258년 충주별초가 박달현에서 몽고병을 저격 포로가 된 사람들과 우마 및 무기를 빼앗았다는 전투다 유격전 형태의 전투다.

 

이처럼 충주는 강인한 정신력과 충성심으로 몽고병과의 싸움에서 9전8승을 거두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충주인의 강인한 정신력은 앞으로 우리세대는 물론 미래세대가 본받아 충주발전의 기틀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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