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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생일, 내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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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주
기사입력 2019-06-25

▲ 신옥주 주부독서회원     ©

6월 23일은 내 생일이었다. 시어머니와 형님네 가족들과 내 아이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러나 난 늘 내 생일이 슬프다. 농삼아 “누구 생일 없는 사람 있어?”라 말하며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우울하다.

 

엄마와 나는 생일이 열흘 차이난다. 둘 다 음력으로 지내는데 보통 엄마는 6월 중순이고, 내가 6월 하순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신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십 수 년을 살다 오셨다. 가끔 그 시절을 말씀하셨는데 일본에서 조선인의 삶이 순탄할 리가 없을 거라 예상할 만큼 딱 그저 그런 생활을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재산도 있고 인물도 좋아 일본 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엄마는 그 일본 여인의 옷을 빨고 밥을 하는 조건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광복 후에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엄마를 차갑게 대하셨다. 여쭤보지 않아서 그 속내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남편이 부인인 자신은 내버려두고 딸만 일본으로 데려가서 호강시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아버지와 결혼할 때는 이미 전처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도 시집오셨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당시에 여고까지 다닌 엄마를 이런 집으로 시집을 보내다니 이해가지 않는다.

 

엄마는 아버지와 아들 넷이 굴 속 같은 집에서 얼굴은 황달기가 있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눈물이 나서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친정이 기댈 곳이 못 되는 곳이었으니까 그랬을 거라 짐작해본다. 그래도 엄마는 늘 아버지에게 무진장 잘했다. 찬 음식을 드리는 법이 없었고 험한 시대를 살아 온 아버지가 보리밥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 시대는 어느 집에서나 흔했던 잡곡밥도 우리 집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여름에는 모시로 두루마기를 지어 드렸고 겨울에는 솜옷을 직접 만들었다. 아버지 생신은 정월 초엿새라서 설이 지나고 바로 다가왔는데 늘 경로당 어르신들을 모시거나 음식을 해 날랐다.

 

우리 집은 대농이라 논도 많고 밭도 많아서 일거리가 끊임없이 많았다. 게다가 동네에서 두 번째로 큰 포목점을 운영하던 엄마는 쉬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바쁜 집에 꼭 일이 많은 시기에 엄마 생신이 있다. 요즘도 알아주는 특산품 단양 마늘을 캐는 시기이다. 보통 열 명 남짓 일손을 부리던 집이지만, 옛날에는 주인도 똑같이 일을 했고 새참까지 하면 오히려 일꾼들보다 일이 더 많았다. 그런 엄마에게는 정말 무심한 막내가 있었는데, 엄마 생신을 제대로 챙겨드린 적이 없는 고약한 딸이다. 막내로 태어난 덕에 받기만 했지 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감성이라도 풍부했으면 마음이라도 헤아렸겠지만 그마저도 부족하여 저만 아는 못된 딸이 바로 나였다. 열흘이 지나 내 생일이 돌아오면 미역국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촌구석에서는 구하기 힘든 꽃게탕을 해주셨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딸을 위해 말간 전을 따로 부치고 반찬을 하셨다.

 

나는 내 생일이 싫다. 내 단점이 너무 많이 보이고 느껴지고 나만 아는 내가 생각나서 너무나 싫다. 왜 이제야 이런게 보이는지 화가 난다. 내가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시댁 대소사를 챙기면서도 엄마 생일을 언제 해드렸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 생일이라고 꽃다발을 준비하고 선물로 뭘 고를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난다. 이런 나를 엄마라고 챙기는 자식들을 보면 더욱 예전의 내가 보인다. 과연 내가 자식들에게 생일을 축하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서 내 생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아이들은 섭섭하다며 작게나마 서프라이즈 파티를 했는데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이런 나에게 저리도 따뜻한 보물들을 엄마가 주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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