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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의 인물 충무공 이수일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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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대표이사
기사입력 2017-12-21

충주가 낳은 또 하나의 인물 이수일 장군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지난 13일 충주시청 탄금홀에서 열렸다.

 

충주는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에서 수많은 일을 감당하고 또한 그 일로 인해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하여 크게 알려지지 못함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하나 역사의 중추적인 인물을 찾아내어 충주가 왜 호국의고장이며 충성을 다해 국가를 지키는데 헌신을 하였는가를 밝혀 나가야 할 때다.

 

이수일 장군에 대한 생애를 상세히 밝혀 나가는 소명에 이어 충주를 빛낸 인물들을 계속 찾아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편집자 주>

 

 

최일성 교수가 밝히는 이수일 장군

 

충무공 이수일 장군은 1554년 충주목 서촌 시곡(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서 아버지 란과 어머니 단양 우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계순이며 호는 은암이다.

 

15839월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훈련원봉사로 벼슬을 시작했다.

 

이후 1590년 선전관을 거쳐 1597(선조 24) 장기 현감이 되었고 장기현감 재직시인 1592년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약화 될 때로 약화된 조정은 조총을 앞세운 왜군에 대항할 힘이 없자 도망가기 바빴다.

 

그러한 와중에도 장군은 의병을 모아 밀양부사 한효순과 함께 적을 토벌하였다.

 

12회에 걸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오르게 되어 1592년 임진년 10월 밀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특별한 공이 없는데 중한 벼슬을 제수하였으니 개정해 달라고 요청 통정대부(3)에서 종4품 조산대부로 강등되었으나 직책은 그대로 밀양도호부사를 맡아 경상도순찰사가 된 한효순 휘하에서 왜적 토벌에 앞장섰다.

 

이듬해인 1593년 장군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어 울산에서 왜적과 싸워 승리하여 적선 4척을 나포하는 공을 세웠다.

 

이공으로 가선대부 행, 경상좌도수군 절도사(2)로 품계가 올랐다.

 

또한 15949월엔 선조임금이 이순신, 원균, 권율 등 11장수에게 이엄(사모 밑에 쓰는 모피 방한구)를 하사하였는데 경상좌수사 이수일 장군도 함께 받았다.

 

이는 이수일 장군이 왜적과 대치한 중대한 장수로 보았다는 뜻이 된다.

 

선조는 이수일 장군의 승첩격려교서에서 후한 녹을 먹고 은혜를 받는 구신 중에서 충국지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사람 중에서 나오는 것을 이제야 알았도다. 그대와 같은 신하가 몇 명만 있어도 짐이 오늘과 같은 수모를 당했겠는가? 일찍이 그대에게 제곤의 임무를 맡겼던들 승전보가 어찌 오늘에 와서야 전해 졌겠는가. 그대를 진작알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적었다.

 

이는 승첩에 대한 선조의 기쁨과 앞으로 기대와 촉망이 얼마나 컷던 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명군의 지원과 의병의 강력한 저항으로 왜군이 남쪽으로 내려가자 이번에는 북방이 소란스러워졌다.

 

건주위 노을가치와 누루하치가 군사력이 강해지자 조정은 1596년 이수일 장군을 회령부사로 임명하게 이른다.

 

공이 북방의 소임을 다 하기 전에 또 다시 왜군이 정유재란은 일으켰다. 조정은 침공경로가 호남 일 것으로 예측하고 이수일을 나주목사에 임명하였으나 부임도 하기 전에 경상도 쪽으로 쳐들어오는 대군을 막기 위해 성주목사로 임명 주요 요충지인 성주를 지키게 하였고 이수일은 도순찰사인 권율의 지휘를 받아 왜적과 싸웠다.

 

15581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왜군이 철군하자 이덕형은 이수일이라면 전란 후 수습을 잘할 것이라고 장계를 올려 그해 12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장군은 1599(선조 32) 북병사 겸 경성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인 1600년 호적의 습격과 내침이 잇따르자 장군은 조정에 토벌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 1601년 장수와 군관을 거느리고 토벌하여 어유 간에서 풍전보까지 300여리에 이르는 곳에 호적을 소탕하였다.

 

1602년 장군이 경상우병사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북방의 호적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해 북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장군은 당시 창원에 있던 경상우병영을 병영을 설치할 곳이 못된다고 하여 진주로 옮길 것을 청원하여 제찰사 이덕형, 부제찰사 한운겸, 순찰사 김신원 등이 옮기려다 실패한 병영을 진주로 옮기고 경상우도 병마사 겸 진주목사가 되었다.

 

진주 목사가 된 후 왜란으로 폐허가 된 진주성 복구에 최선을 다했다. 상황이 매우 어려웠으나 몸소 솔선하여 복구 작업에 나서고 부역을 공평 하에 함으로써 주민의 동조를 얻어 1년 만에 복구공사를 끝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장군은 이공로로 자헌대부로 승차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자헌대부는 6경의 반열이니 공로가 중하지 않으면 제수하기 어렵다. 하여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선조 임금이 공이 있는 신하에게 관직을 주는 것이 무엇이 경악스러운가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1605년 유영경이 이수일은 함경도에서 인심을 깊이 얻었다하여 길주목사로 추천하여 길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도 길주산성을 성진으로 옮겨 축성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기한을 넘겨 부임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충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2개월여 만에 호군으로(4) 복무하다 다시 종3품 수원부사로 발탁된다.

 

선조의 승하와 더불어 광해군 때인 16086월 북병사 겸 경성도호부사에 임명되었고 1610년 임기 만료되었으나 북관의 사태가 걱정되어 유임되었다.

 

1612(광해군 4) 2월 평안도 병마 수군절도사 겸 영병대도호부사로 임명되어 1615년 임기를 마치고 중추부지사 겸 포도대장이 되었다.

 

16177월 누루하치가 나라를 세워 후금이라 하고 그 기세가 등등하여 정세가 급박한 상황에서 장군을 다시 북병사 겸 경성도호부사로 임명하여 북방경계를 강화 하였고 1617년 다시 포도대장으로 복귀하여 역적 이춘기 등을 체포한 공로로 숭정대부로 승차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18년 다시 숭록대부로 승차했다. 또한 1623년 인조반정 후 7월 지중추부사 겸 5위 도총부 도총관 포도대장으로 조정에서 경연에 참여하여 장재로서 인정받는 인물이 되었다.

 

1624(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고 장군을 평안병사 겸 평안함경 황해 등 3도 부원수를 삼아 도원수 장만과 함께 난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수일 장군은 안현 싸움에서 이괄의 반군을 대파했는데 1,000여명의 군사로 적을 흩어지게 한뒤 흩어진 적을 공격하는 전략으로 공을 세웠다.

 

이공으로 인해 보국숭록대부에 가자되고 진무공신 2등에 책록 되었다.

 

1624(인조 3) 이수일 장군은 보국숭록대부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 영변 대도호부사가 되었다.

 

또한 1625년에는 오위도 총부 도총관 지훈련 원사 포도대장이 되어 경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1628(인조 6) 형조판서가 되었다.

 

1631년에는 비국제조와 남한수어 대장으로 남한산성 축성을 감독하였고 1632년 채직상소를 올려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 난지 1개월여 만인 527일 일생을 마쳤다. 평생을 군인으로 복무하다 세상을 뜬 것이다.

 

 

이수일 장군의 품성과 평가

 

이수일 장군은 선조대의 재상 이원익을 비롯한 윤근수, 김응남 등이 쓸만한 인물로 평가하여 요직에 두루 등용 되었고 청렴함과 인애한 인품으로 군사들이 잘 따르는 장수 그리고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수령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리하여 영남의 진주와 성주, 통영과 경기도 수원 함경도 경성에 그의 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 그가 이괄의 난을 평정할 때 도원수 장만의 부당한 평가로 진무공신 2등에 책정되는 부당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공에 대한 평가가 당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고 장만과 그와 맥을 같이 하는 사람들만이 부정적이었다.

 

공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겸손하고 당파를 초월한 생활을 하였다. 광해 일기에 따르면 이수일은 광해 14(1622) 북진에 재차 부임하여 정근함과 인애로음으로 사졸들의 인심을 얻었으나 장수로서의 재능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에 서울시립대 김창수 교수는 임진왜란 때의 활약과 장기간 북병사에 임명되었던 점 그리고 광해군 11(1619) 비변사에서 심순과 이수일이 북방방어를 맡고 있어 문제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이라고 했다.

 

이수일 장군에 대한 공훈논란은 이괄의 난으로 인해 또다시 벌어지게 되는데 이 괄은 인조반정시 김류와의 갈등으로 앙금이 가시질 않았고 공신책봉에도 불만이 있는데다 자신을 변방으로 부임시킨데 대한 불만 등으로 인해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연려실기술이나 국조보감에는 이괄이 이수일보다 직급이 낮았다는데 불만을 품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창수 교수는 이수일이 인조반정후 정사공신에 책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신책정 문제로 다툴 이유가 없고 다만 높은 직급을 받은 것은 당시 이수일 장군이 반정에 직접 참여 하지 않았음에도 반정세력으로부터 상당한 대우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또한 이괄의 난 평정시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이수일간에 알력이다.

 

토벌군은 장만의 본진 및 정충신과 남이홍 부대 그리고 부원수 이수일 부대로 나뉘었는데 장만은 이수일이 재 밑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내보내지 않았다고 1등으로 책록 되었던 이수일의 공신책정을 3등으로 강등시키려 했던 점.

 

이로 인해 이수일과 장만의 갈등으로 2등 공신으로 책정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평가에서 이상정과 장만의 부하였던 최현을 제외한 이원익, 전식, 허목, 정호, 이이명, 정약용 등은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 했다.

 

정호는 이수일이 안현을 점거함으로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대에 정치적 학문적으로 높게 평가받던 인물들과 서인계 인사들 그리고 노론계 인사들은 물론 허적, 허목과 같은 남인계 인사들도 안현전투에서 이수일의 공적을 인정했다.

 

또한 정조대왕 역시 녹훈장신 12명을 거론하는데 이수일이 들어있었다.

 

녹훈장신은 국초부터 훌륭한 무장, 이지란, 마천목, 이정석, 이숙기, 어유소, 이순신(李舜臣), 권율, 이억기, 이순신(李純信), 장만, 이수일, 정충신 등이다.

 

또한 신동국여지승람에서도 장만, 이수일, 정충신이 공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수일 장군은 79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 이후 1645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증작되고 1675(효종 8) 장군에게 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86(숙종 12) 셋째 아들 완이 우의정이 되자 영의정에 추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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