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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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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기사입력 2021-01-27

▲ 김영희 시인     ©

글구멍은 글이 들어가는 머리라는 뜻으로 글을 잘 이해하는 지혜를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집에서 책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을 읽다 보면 글구멍이 트이기도 하지만, 답답함이 글구멍을 어둡게 하기도 한다. 가끔은 서서 책 한 권을 읽기도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다가 그루잠이나 말뚝잠을 잘 때도 있다. 어느 날은 책을 읽었어도 기억이 희미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집중을 하지 않아서이다ㆍ

 

그러면 책을 놓고 산책을 나가거나 음악을 듣는다. 늘 밥보다 먼저 먹는 것이 글이다. 글에는 들리지 않는 음악도 있고 풍경도 있다. 글로 배부른 아침을 맞이하는 날에는 마당에 나가 일출을 바라본다. 신축년에는 우리집 마당에서 새해맞이를 했다. 마당에서 보는 일출은 올해가 처음이지만 태양의 모양은 더욱 특별하게 보였다. 신축년 새해에는 일출과 일몰, 월출과 샛별, 삼태성까지 사진에 담았다.

 

1월의 일출은 남산에서 계명산 쪽으로 햇병아리 걸음으로 가면서 뜬다. 우리집 마당에서 바라본 일출과 일몰의 동선 즉 동쪽과 서쪽의 거리는 아주 짧아 보인다. 1월 25일 해 뜨고 해 지는 시간까지는 10시간 11분이다.

 

책을 읽다가 한낮의 햇볕이 환하게 비추면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킨다. 그러면 겨울바람과 봄기운이 시새움 하듯 들어온다. 창문으로 들어온 해그늘이 선명하다. 환기시키는 동안 해의 이동을 그림자를 통해 1분 간격으로 벽에다 연필로 표시해 본다. 측면과 정면으로 비추었을 때 이동 간격은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관찰하면서 보는 태양은 생각보다 빠르게 간다. 태양이 우리집 창문을 통과하는 시간은 30분 정도이다.

 

독서하다 눈이 피로해지면 인적이 드문 과수원 길을 따라 계명산 쪽으로 걷는다. 며칠 전만 해도 눈이 하얗게 쌓였던 산과 들을 햇살이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계명산과 남산은 금강산 개골산처럼 겨울산의 윤곽이 드러나 매우 아름답다. 작은 물고기를 품은 시냇물 소리가 졸졸거린다. 어느덧 겉보리 밭에는 봄보리 싹이 파르라니 얼굴을 내민다. 새들은 재잘재잘 노래 부르며 물가에서 탐방탐방 몸단장을 한다. 냉이 캐는 아낙들의 호미 끝도 경쾌하다. 진한 냉이 향이 날아온다. 흙의 향기도 냉이를 따라 퍼진다. 말뚝잠으로 겨울을 난 풀들이 졸음도 없이 새뜻하다. 드문드문 과수원에도 새로운 집들이 들어선다. 이대로 가다보면 안림동 과수원도 십년 후엔 과수원보다 주택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절 벗는 소리는 자연이 사람보다 정확하고 빠른 것 같다. 햇살이 바람을 두르고 춤춘다. 작은 벌레도 추위에 몇마리 날아다닌다.

 

나에게 산책은 온몸으로 읽는 글구멍이다. 온몸으로 산책하는 자연독서다.

 

과수원 길을 벗어나 천천히 걷다보니 호암지까지 갔다. 날씨가 봄날 같아서인지 산책 나온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호수에서 정다워보이는 수달 한 쌍을 만난다. 수달은 귀여운 표정으로 삐삐거리며 물속을 빠르게 들락날락거린다. 걷다보면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도 보게 된다. 가끔은 반갑고 오래된 지인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나 마스크에 가려 눈만 보이는지라 몰라보기도 한다. 간혹 반가운 사람도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내광쓰광 지나간다.

 

코로나19를 조심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숲속 의자에 앉아 있으면 겨울 녹는 냄새가 미끄럼을 탄다.

 

썰매 타며 놀던 물닭들은 어디로 날아가고 한 마리만 무리에서 떨어져 있다. 얼음이 얼자 물닭은 사람들이 조금씩 호수에 던져준 야채와 쌀을 주워 먹는다. 시간이 흐르자 통통해진 한마리 마저도 날아갔다. 새카맣게 모여 있던 물닭은 며칠 동안 모두 떠났다. 이제는 까치와 참새 이름모를 새들이 햇살을 쪼아 먹는다.

 

지난 연말에는 둑방건너 호숫가에 멋진 소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소나무를 보면서 배웅이란 시를 지었는데, 열흘 후 가서 보니 소나무가 사라졌다. 추운 겨울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배웅이란 시를 지었더니 소나무를 배웅하는 시가 되었다.

 

대로변 호숫가에는 수련이 입었던 얼음을 흐트러짐 없이 벗는다. 자연이 겨울을 벗는 것처럼 코로나도 물러가서 마스크를 벗고 시원하게 다니고 싶다. 입춘을 일주일 앞두고 겨울도 꼬리를 내린다. 자연은 때가 되면 알아서 떠난다. 산책은 글구멍을 트이게 하는 마중물이다. 글을 이해하고 지혜의 눈 떠지면 반쯤만 아는 지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진 것은 없지만 책은 점점 쌀자루처럼 쌓여 책부자가 돼 간다. 빈 곳간 같은 내 삶을 채워주는 것은 글구멍이다. 글구멍이 트이니 글이 나온다. 글이 나오니 책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신축년에는 지혜롭게 코로나19 잘 물리치고 꿈을 이루는 새해가 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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