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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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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기사입력 2020-05-12

▲ 김영희 시인     ©

봄날은 가는 만큼 오고 오는 만큼 간다.

 

올 봄은 사람보다는 숲을 가까이 했다. 그러다보니 산수유서부터 아카시아까지 봄꽃이 피고 지는 걸 가까이서 보게 된다. 오후에 두어 시간씩 산책을 나가면 아카시아와 찔레향이 불어와 기분을 좋게 한다. 이럴 때는 마스크에 가려진 코와 입을 내놓고 심호흡을 한다.

 

그동안 딸 집에 몇 달 있다가 집에 왔다. 집에 있다가 안림동 과수원 길을 걷다 보면 예전에 없던 청보리밭을 서너 군데 만난다. 바람이 불면 청보리는 파도처럼 일렁인다. 보리깜부기도 간간이 머쓱하게 서 있다. 오동통 살이 오르는 청보리밭에 서면 해거름 빛이 들어 멀리 여행 나온 느낌이다. 귀한 보리밭을 집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어 참 좋다. 어릴 때 보았던 곱삶이 보리밥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이남박에 보리쌀을 씻어 한 번 끓인 후 건져 놓았다가 쌀하고 섞어 밥을 지었다. 보리는 한 번 삶으면 미끄덩거려서 꼭 두번을 삶아야 부드럽고 구수한 밥이 되었다. 요즘은 보리쌀도 보기 어려운데 청보리밭이 눈앞에 펼쳐지니 오래된 시간을 책장처럼 넘기는 기분이다. 청보리밭 지날 때는 시간을 잊은 듯 머무르게 된다. 청보리밭은 향기가 없어도 향기가 난다. 보리밭에서 엄마의 향기가 모락모락 난다. 그런 청보리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정중하게 하늘을 우러른다.

 

보리밭 맞은편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벌써 손톱만하다. 사과밭에는 일흔이 가까워 보이는 여인들이 사다리에 올라 열매솎기 하는 모습이 보인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솎아내는 것이다. 열매되기 전에는 가지치기와 꽃이 피면 꽃솎아내기도 한다. 사다리에 올라 일하는 모습이 조금은 위험해 보인다. 그 많은 사과나무에 다닥다닥 열린 사과를 하나하나 다 솎아내야 하니 농사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알 것 같다. 매장으로 나가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은 또 얼마인가. 사과나무 밭은 민들레 씨앗이 제 집인양 차지하고 하얗게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어느 빈집 울타리에 모란이 우아하고 너그러운 향기로 반긴다. 탐스러운 모란꽃에 얼굴을 담그니 우주가 다 꽃송이 같다.

 

계명산 아래는 아름답고 보기 좋은 집들이 늘고 있다. 과수원을 지나 계명산 산책로로 들어들자 아카시아 꽃이 꿀냄새를 풍기며 송이송이 피어난다. 산자락 입구에는 누군가 갔다 놓은 빈 의자가 군데군데 놓여있다. 숨도 고를겸 잠시 앉았다 걸으니 다리가 가뿐해진다. 계명산으로 들어서자, 소쩍소쩍 소쩍쩌 하고 소쩍새가 반긴다. 소쩍새 소리는 해맑으면서도 무언가 애잔하게 들린다. 뻐꾸기와 딱따구리도 이어 반기더니, 온갖 새들의 예쁜 소리가 오월의 축제를 연다. 산에서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턱에 걸친 마스크를 얼른 쓰고 서로 등지며 지나간다. 점점 땀이 나도록 올라가면 산책길에 돌탑이 심심찮게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쌓은 돌탑도 있고 꽤 높이 쌓은 돌탑도 있다. 돌탑을 지나 가팔라지는 곳에는 시인을 생각하며 야생화를 심는 사람도 있다. 그 곳은 3년전 암으로 작고했다는 어느 시인이 매일 올라와 앉아 쉬던 자리라고 씌어있다. 시인을 생각하고 가꾸는 정성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거기서 천보 더 올라가니 약수터가 있다. 나는 시원한 물에 손을 씻고 물을 달게 마셨다. 식수라고 쓰여 있지는 안 지만 물바가지가 두개 걸려있고 물이 시원하고 맑기 때문이다. 내가 물을 시원하게 마시자, 물이 안전한지는 모르겠다고 누군가 다가와 말한다.

 

집근처에서 늘 바라만 보던 커다란 계명산에 한 번 와보니 자꾸 걷고 싶어진다. 새들은 지저귀고 연둣빛 숲은 바람에 살랑거린다. 계명산이 좋아지면서 열흘 사이에, 지난 11일 세번째 올라갔다. 비 온 다음 날이라 숲은 더욱 빛나고 무성해보였다. 우거진 숲으로 들어서자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처럼 들린다. 지나가는 빗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나뭇잎이 잘려 떨어진다. 어떤거는 멀쩡한 작은 가지도 잘려있다. 의아해서 살펴보니 나무에서 벌레가 떨어진다. 누에처럼 실을 뽑아 매달리면서 떨어지다가 아무데나 닿으면 붙는다. 벌레가 나뭇잎을 쏠다가 나뭇잎과 함께 떨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잘려 떨어지는 나뭇잎이 많다. 벌레는 올라가는 길에도 많이 기어다닌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 옷에도 붙어있다. 나는 벌레 조심하라고 알려준다. 약수터에도 시글시글해졌다. 물 마시려고 올라갔는데 먹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일까 며칠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벌레가 나오는 것일까. 싱그러운 숲속이 으스스하다. 갑자기 새들의 맑은 소리마저 멍멍해진다.

 

어린날 어느 해 벌레가 기승을 부리던 생각이 났다. 기분이 오싹해지면서 빨리 내려가고 싶어졌다. 이젠 못 오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하는 걸까. 벌레 때문에 기겁을 해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다 보니 소년과 가족인 듯 보이는 세 사람이 올라간다. 반팔 입은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산에 벌레가 많다고 말해준다. 산책하다가 여성들이 쉬고 있는 의자에도 기어 다닌다. 여성들에게 벌레 조심하라고 하자 그들이 확인 후 바로 돌아서 내려간다. 벌레에 놀라 논길로 내려오자 꿩이 자주 보인다. 사람이 가까이 있어도 가만히 있다. 꿩을 보니 기분전환이 된다. 어느 과수원에서는 소독약 뿌리는 냄새가 난다. 소독약이 없다면 과일이 익을 때까지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세상은 크다고 강한 것만은 아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강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안개 같은 개체수다. 생태계는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소독약이 필요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갑자기 나타난 벌레 때문에 산책은 하기 어려워 졌지만, 숲의 건강은 이상이 없는지 걱정이 된다. 그것은 이미 숲에서 진행 된 결과일 것이다. 숲은 지금 아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벌레가 갑자기 많이 생기는 원인이 무얼까 궁금해진다.

 

집으로 오는 들녘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래도 찔레 향 아카시아 향기가 구겨진 기분을 달래준다. 산은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산은 지금 무언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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